바르셀로나 이틀, 지중해 가는 길에 낀 경유지였는데 계획 없는 게 나았다

캄프 누 입구의 BENVINGUTS 간판

바르셀로나는 목적지가 아니었다.

배낭여행 중반에 프랑스에서 포르투갈로 넘어가야 했다. 지도를 보니 스페인을 통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리옹에서 카풀을 잡았다. 블라블라카로 33파운드, 새벽에 출발해 새벽 4시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지중해를 보러 가는 길에 낀 도시. 딱 그 정도로 생각하고 들어갔다.

새벽 4시에 도착하면 할 게 없다

카풀은 저렴한 대신 시간을 못 고른다.

새벽 4시에 낯선 도시에 내려놓으면 갈 데가 없다. 체크인은 오후고, 카페도 안 열었다. 배낭을 멘 채로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여행에서 제일 무용하다.

그때는 이 일정이 실수라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아니었다. 아무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그날 도시가 주는 걸 그대로 받게 됐다.

하나는 봐야지 싶어서 캄프 누부터 갔다

관광객 모드가 먼저 켜졌다.

축구를 좋아하니 캄프 누는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기가 없는 날이라 경기장 안에는 못 들어가고 입구 앞에서 사진만 찍고 나왔다.

지금 그 사진을 보면 좀 웃긴다. 유럽에서 제일 큰 축구장까지 가서 간판 앞에 서 있다가 왔다. 그래도 그날 유일하게 미리 정해놓고 간 곳이 여기였다.

경기가 있는 날에 맞춰 갔다면 그날 하루는 통째로 축구로 채워졌겠다. 대신 다른 데는 못 갔겠지. 일정이 없으니 오전에 반나절 쓰고 나머지가 그대로 남았다.

하필 박물관이 무료인 날이었다

몬주익 카탈루냐 국립미술관과 계단식 분수

여기서부터 계획이 없어서 좋았다.

몬주익 언덕에 있는 카탈루냐 국립미술관에 갔더니 그날이 무료 개방일이었다. 알고 간 게 아니라 그냥 갔다가 걸렸다.

지금 확인해보니 이 미술관은 매월 첫 일요일 종일, 그리고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이후를 무료로 열어둔다. 평소 입장료는 12유로다.

유럽 미술관 상당수가 이런 식으로 월 1회 이상 무료 시간대를 둔다. 일정을 미리 촘촘히 짜고 다니면 오히려 그 날짜를 못 맞춘다.

안에서 무하와 피카소, 가우디의 작품을 봤다. 비가 와서 하늘은 흐리멍덩했는데 실내에 들어가기엔 오히려 좋은 날씨였다.

미술관 앞으로는 계단식 분수가 길게 흘러내린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한참 앉아 있었다.

"우연에 올라타는 데도 자리가 필요하다. 일정이 꽉 찬 여행에는 그 자리가 없다."

내려오는 길에는 옛 투우장을 개조한 건물을 지났다. 붉은 벽돌 외벽은 그대로 두고 안은 쇼핑몰로 바꿔놓은 곳이다. 투우를 금지한 지역이라 경기장이 용도를 잃었다. 그래서 껍데기만 남기고 속을 갈아 끼웠다.

혼자 왔는데 혼자 먹지 않았다

쇼핑몰로 개조된 옛 투우장 외벽

두 번째 우연은 저녁에 왔다.

당시 배낭여행자들이 쓰던 네이버 커뮤니티가 있었다. 거기에 같이 밥 먹을 사람을 구하는 글이 올라와서 따라갔다. 처음 보는 한국 사람들과 먹물 빠에야에 상그리아를 놓고 앉았다.

정보 교환이 반이고 수다가 반이었다. 어디가 사기가 많더라, 그 도시는 며칠이면 되더라 같은 이야기. 혼자 다니다 보면 이런 대화가 며칠씩 없다가 한 번씩 터진다.

그날 이후로 혼자 여행할 때 일정보다 사람을 먼저 찾게 됐다.

밤 11시 반의 람블라

야자수가 선 레이알 광장

바르셀로나는 잠을 안 자는 도시였다.

람블라 거리와 그 옆 광장은 밤 11시 반에도 사람이 가득했다. 노천 테이블이 다 차 있고 아이들도 돌아다녔다. 한국에서 그 시간에 그렇게 가족 단위로 앉아 있는 광장은 잘 없다.

숙소도 마찬가지였다. 10인실 남녀 혼숙이었는데 새벽까지 들락날락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처음엔 못 자겠다 싶었는데 이틀 지나니 그러려니 했다.

사소한 실패도 있었다. 지하철 매표기에 동전을 넣었는데 반응이 없어서 직원을 불렀다. 스페인어는 못 하고 영어도 잘 안 통해서 손짓으로 해결했다. 이런 건 어느 도시에서나 한 번씩 겪는다.

이틀 만에 마드리드로 떠났다

공사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첨탑

마지막 날 아침에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봤다.

아직 공사 중이라 크레인이 첨탑 사이에 박혀 있었다. 백 년 넘게 짓고 있는 건물을 공사 중인 상태로 보는 게 오히려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는 다시 카풀을 잡아 마드리드로 갔다. 25파운드였다. 도착한 지 이틀 만에 떠난 셈이다.

"짧게 있었기 때문에 못 본 게 많은데, 짧게 잡았기 때문에 계획도 없었고 그 덕에 걸린 것도 많다."

다시 간다면 이틀은 아니겠지만

솔직히 바르셀로나는 이틀로 볼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가우디 건축만 제대로 보려 해도 하루가 더 든다. 해변과 시장까지 넣으면 나흘은 걸린다. 이 글을 일정 참고용으로 읽는다면 이틀은 짧다고 미리 말해두겠다.

내가 못 본 것도 명확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외부만 봤고 내부는 못 들어갔다. 구엘 공원도 카사 바트요도 지나쳤다. 바르셀로네타 해변은 근처도 못 갔다. 지중해를 보러 가는 길이라고 해놓고 정작 바다는 안 본 셈이다.

그런데 경유지로 잡은 도시에서는 기대보다 많이 건졌다. 목적지로 정한 도시에서는 오히려 실망하는 일이 잦았다. 로마가 그랬다. 기대가 크니 물가도 날씨도 다 눈에 걸렸다.

바르셀로나에는 아무 기대가 없었다. 그래서 무료 개방일도, 처음 본 사람들과의 저녁도 전부 덤으로 느껴졌다.

여행 경로를 짤 때 경유지를 그냥 통과하지 말고 하루나 이틀 끊어보는 걸 권한다. 기대 없이 들어간 도시가 의외로 오래 남는다.

맛있는 김밥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