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게임은 선반이 아니라 계정에 있다

내 스팀 계정에는 게임이 104개 있다. 합쳐서 2,060시간을 플레이했다. 그런데 그중 하나도 만질 수 없다. 케이스도 카트리지도 없이, 전부 계정 안에 목록으로만 존재한다. 늘 그러려니 하던 사실인데, 어제 소니의 발표를 읽고 나서는 이 목록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위 사진 같은 중고 게임 가게 진열장이 정말로 과거의 풍경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소니가 새 게임의 디스크를 2028년에 끊는다고 했다
2026년 7월 1일, 플레이스테이션 공식 블로그에 2028년 1월부터 새로 나오는 플스 게임을 디스크로 생산하지 않겠다는 발표가 올라왔다. 이미 발매됐거나 그 전에 디스크로 나올 게임에는 영향이 없다고 못을 박았으니, 내일부터 디스크가 사라진다는 말은 아니다. 이유로 든 문장은 소비자 선호의 변화, 한 줄이었다.
숫자를 보면 왜 지금인지 보인다. 테크크런치가 인용한 소니 2025 회계연도 4분기 실적 기준으로 PS4와 PS5 풀게임 판매의 85%가 이미 디지털이다. 실물은 15%다. 그 실물을 팔던 게임스탑은 최근 두 회계연도 동안 1,300개 넘는 매장을 닫았다. PS5 디지털 에디션은 처음부터 디스크 드라이브가 없었고, 엑스박스도 디스크 없는 모델을 나란히 팔았다. 이번 발표는 그 방향에 날짜를 붙였을 뿐이다.
타이밍은 공교롭다. 발표 며칠 전에는 GTA 6 실물판 상자에 디스크가 아니라 다운로드 코드만 들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팬들이 반발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소니는 같은 날 PS3와 Vita 스토어를 올해 일부 지역부터, 내년에는 전 세계에서 닫는다는 공지도 함께 냈다. 이미 산 콘텐츠는 당분간 다운로드할 수 있다고 했다. 영원히는 아니라는 뜻이다.
편해진 만큼 조용히 사라진 것들이 있다
디지털이 편한 건 부정할 수 없다. 새벽에 사고 싶으면 그 자리에서 받고, 케이스가 책장에 쌓이지도 않는다. 문제는 편의의 반대편이다. 디스크는 물건이라서 친구 손에 건너갈 수 있었고, 다 하고 나면 중고 가게 진열장에 오를 수 있었다. 절판된 타이틀에 웃돈이 붙는 것도 물건이니까 가능했던 일이다. 계정에 묶인 라이선스는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라이선스가 영구적인 것도 아니다. 스팀은 2024년 10월부터 결제 화면에 "디지털 상품의 구매는 스팀에서 그 상품을 이용할 라이선스를 부여한다"는 배너를 띄운다. 밸브가 갑자기 솔직해진 게 아니라, 디지털 상품에 소유를 암시하는 표현을 함부로 못 쓰게 만든 캘리포니아 법 AB 2426 때문이다. 실제로 개발사가 스팀에서 게임을 내리면 그 게임은 라이브러리에서도 지워진다. 이미 PC에 설치해 둔 것만 삭제되지 않고 남는다. GOG는 이 배너를 X에서 그대로 패러디했다. GOG에서 사면 오프라인 설치 파일을 주고, 그건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재치 있는 저격이지만, 그게 광고 문구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시장의 기본값이 어느 쪽인지 말해 준다.
내 계정으로 돌아와 보면, 104개 중 81개는 하다 말았고 20개는 켜 본 적도 없다. 가장 오래 붙잡은 게임이 276시간을 넣은 Slay the Spire다. 2,060시간짜리 목록이지만, 정작 이 게임들의 소유권은 밸브가 쥐고 있고 나는 이용 권한만 받는다. 내가 돈을 냈다는 사실과, 그게 계속 내 것으로 남는다는 보장은 서로 다른 문제였다.
물건으로 게임기를 기다려 본 기억이 있다. 2017년 3월 말, 사고 싶은 물건 목록에 닌텐도 스위치를 적어 두고는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메모와 함께 실패라고 표시했다. 그 상자가 그해 12월 1일에야 도착했다. 그날 노트에는 "닌텐도스위치 도착"이라는 짧은 기록이 남아 있다. 다음 날 바로 마리오 오딧세이를 숲의 마을까지 진행했고, 사흘 뒤에는 달을 얻을 때 나오는 문구가 좋아서 여기저기에 you got a moon을 올려 댔다. 여덟 달을 기다린 물건이라 도착 자체가 기록할 사건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마리오를 카트리지로 샀는지 다운로드로 받았는지는 기록에 없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 도착을 적어 두던 그때조차 게임의 물성은 이미 흐릿해지고 있었던 셈이다.
발표 아래로 쏟아진 댓글들
이 발표를 다룬 해커뉴스 스레드에는 하루 만에 댓글이 600개 넘게 달렸다. 온도는 갈린다. 대형마트의 게임 코너가 이미 초라해진 지 오래니 사업적으로는 이해된다는 쪽이 있고, 최근 플레이스테이션에서 사 둔 영화의 시청 권한이 회수된 일까지 겹쳐 다시는 플레이스테이션을 사지 않겠다는 선언도 있다. 그 사이에서 가장 많이 반복된 지적은 이것이다. 디지털 전환으로 중고 시장이 사실상 죽었고, 그 덕을 보는 건 새 게임을 파는 쪽이라는 것. 그리고 어김없이 그 밈이 등장한다. 당신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할 것이고, 행복할 것이다.
반발은 밈에서 끝나지 않고 서명으로 조직됐다. 유비소프트가 레이싱 게임 The Crew의 서버를 닫고 구매 목록에서 지워 버린 일이 불씨가 된 Stop Killing Games 운동은, 서버가 닫히면 산 게임이 통째로 증발하는 관행을 막자며 유럽연합 시민 이니셔티브로 서명 130만 개를 모았다. 올해 EU 집행위원회는 입법으로 화답하지 않았지만, 운동 측은 예상한 결과였다며 유럽의회 의원 45명의 지지 서명을 받아 둔 다른 법안 경로로 계속 가겠다고 한다. 산 것을 소유하고 싶다는 요구는 이제 감성 문제를 넘어 서명 130만 개짜리 정치 의제가 됐다.
소유가 아니라 접속이 기본값이 될 때

물리 미디어가 저무는 게 아깝다고 말하면 종종 감성팔이로 취급받는다. 나도 손맛과 추억만으로 되감기 버튼을 누르고 싶지는 않다. 이건 단순한 취향 문제라기보다, 소유의 정의 자체가 바뀌는 문제다. 게임을 산다는 말의 뜻이, 물건을 손에 쥐는 일에서 서비스에 내 이름을 올려두는 일로 옮겨가는 중이다. 디스크를 사면 그 물건은 내 것이었고, 내가 관심을 잃어도 상자는 남아 누군가에게 건네졌다. 다운로드를 사면 나는 접속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된다. 서비스가 멈추면 권리도 멈춘다.
물론 디지털이라고 전부 증발하는 건 아니다. 오프라인 싱글 게임은 설치 파일만 있으면 서버와 무관하게 돌아간다. 문제는 그 파일을 다시 받을 창구가 스토어 하나뿐이라는 데 있다. PS3와 Vita 스토어 공지의 "당분간"이라는 단서가 그래서 마음에 걸린다. 창구를 닫는 날짜는 언제나 파는 쪽이 정하고, 그날 내 목록이 어떻게 되는지 나는 약관 말고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 글을 읽는 사람도 아마 나처럼 디지털로 넘어온 지 오래일 것이다. 되돌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앞으로도 스팀에서 살 것이고, 2028년 이후의 플스 신작도 대부분 문제없이 받아질 것이다. 다만 발표를 읽고 나서 한 일이 하나 있다. 2017년 12월의 그 기록을 다시 꺼내 본 것이다. 그 상자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도착했다는 한 줄은 남았다. 요즘 사는 게임들은 도착하는 순간이 없어서, 적어 둘 사건조차 생기지 않는다. 소유가 빠져나간 자리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건 어쩌면 그런 순간들이다.
참고: PlayStation.Blog 공식 발표 · TechCrunch 보도 · Tom's Hardware: 스팀 소유권 안내 · Hacker News 반응 스레드 · Stop Killing G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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