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미장센을 따라 걷는 낭만여행

핑크빛 케이크 같은 호텔이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화면 한가운데 정확히 서 있다. 보라색 제복을 입은 벨보이가 좌우로 갈라진 복도를 종종걸음으로 지난다. 창틀도, 엘리베이터도, 접시 위 케이크의 각도까지 자를 대고 맞춘 듯 대칭이다.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본 사람이라면 이 장면을 줄거리보다 색으로 먼저 기억한다.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보다 그 파스텔이 진하게 다가오고, 대사보다는 카메라 속 프레임의 균형이 떠오른다.
나도 그 기분을 느꼈다. 이 영화는 2014년 극장에서 봤고, 소설 같은 이야기와 색채가 아름다운 영화라고 평론했다. 정작 그날은 영화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집들이가 취소돼서 안양천을 걸으며 꽃을 보았고, 저녁에는 PC방에서 친구들과 게임을 하며 영화가 잊혀졌다. 그런데 2015년 7월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색안경을 낀 듯 동화 속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눈앞의 골목을 영화가 칠해 둔 색으로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영화 이야기이면서 여행 이야기다. 이 영화가 어쩌다 줄거리 대신 색으로 기억되도록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 색안경을 낀 채 진짜 부다페스트를 걸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줄거리는 잊어도 색은 남도록 설계된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이 2014년에 내놓은 장편이다. 줄거리만 옮기면 왁자한 소동극이다. 1930년대 유럽 어딘가의 산중 호텔, 전설적인 컨시어지 구스타브 H는 단골 노부인이 의문의 죽음을 맞자 그녀가 유언으로 남긴 명화 '사과를 든 소년'을 물려받고, 유산을 노리던 유족에게 살인 누명을 쓴다. 수감과 탈옥, 설원 추격전이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지고, 그 모든 소동을 신참 로비보이 제로가 곁에서 함께 겪는다. 범죄 이야기를 다루는데도 본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이상하게 줄거리보다 파스텔 톤의 기묘한 감각이 맴돈다.
우연이 아니다. 앤더슨은 이 소동극을 겹겹의 액자 안에 넣었다. 한 소설가가 노년의 제로에게서 옛날이야기를 전해 듣는 구조라서, 관객이 보는 전성기의 호텔은 처음부터 두 다리쯤 건너온 기억이다. 시대마다 화면 비율까지 바꿨다. 1930년대 장면은 옛날 영화처럼 정사각형에 가깝게 좁고, 1960년대는 옆으로 길게 넓어지고, 현대 장면은 그 중간쯤이다. 색도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 전성기의 호텔은 레드와 핑크가 선명하고, 전쟁이 다가오면 화면이 점점 바래 흑백까지 내려가며, 전후의 쇠락한 호텔은 베이지와 주황으로 칠해진다. 화면비가 시간을 가리키고, 색이 흥망을 말한다. 줄거리를 까먹어도 색의 온도가 식어 가는 모습은 머릿속에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게 나만의 착각은 아니고 실제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9개 부문 후보에 올라 4개를 받았는데, 넷 다 화면과 소리를 힙하게 만들었다는 이유가 된다. 미술상, 의상상, 분장상, 음악상. 각본상도 작품상도 아니고, 호텔의 벽지와 보라색 제복과 노부인의 분장과 왈츠풍 음악이 상을 받았다. 그러니 이 영화를 색으로 기억하는 건 게으른 감상이 아니라, 감독의 설계가 제대로 색칠된 거다.
도시는 내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색칠되어 있었다
부다페스트에 내리기 전까지 내가 아는 부다페스트는 사실상 이 영화 한 편이 전부였다. 그러니 도착하는 순간은 백지가 아니었다. 눈은 낯선 거리를 보는 동시에 기억 속 화면을 꺼내 그 위에 겹쳤고, 나는 지금 걷는 골목이 아니라 1년 전에 본 영화 장면을 먼저 떠올리고 있었다. 한 번 눈에 익으면 잘 지워지지 않는 종류의 화면이, 가 보지도 않은 '중부 유럽'이라는 막연한 지역을 미리 물들여 둔 것이다.

물론 영화의 무대는 엄밀히 부다페스트가 아니었다
부다페스트 골목에서 이 영화를 떠올리는 건, 따져 보면 좀 이상한 일이다. 극 중 배경은 주브로브카(Zubrowka)라는 가상의 국가다. 지도에 없는 나라이고, 헝가리의 그 도시와는 이름만 얼핏 겹칠 뿐이다. 촬영도 부다페스트에서 이뤄지지 않았다. 주요 촬영지는 독일 동부의 국경 소도시 괴를리츠였다. 폐업한 옛 백화점의 아트리움을 호텔 로비로 꾸며 찍었다고 하고, 앤더슨이 철거 위기에 놓인 그 백화점의 매입까지 고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호텔의 외관은 한술 더 뜬다. 화면 속에 우뚝 선 그 분홍 건물은 실물이 아니라 높이 3미터쯤 되는 미니어처 모형이었다고 한다. 배경의 설산도 19세기 독일 풍경화풍의 그림에 합성한 것이라고 하니, 저 호텔은 어디에도 존재한 적이 없는 셈이다. 파스텔 팔레트조차 특정 도시의 색이 아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미 의회도서관에 소장된 알프스 리조트의 옛 포토크롬 인화 사진들에서 색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파리나 빈 같은 유명한 유럽이 아니라 대중에게 낯선 풍경 사진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그 '부다페스트의 색'은 이중 삼중으로 지어진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실제 배경이 아닌 도시에서, 존재한 적 없는 호텔 모형으로 찍어, 제목에만 부다페스트를 붙였다. 색안경이 향하는 대상 자체가 처음부터 허구였다. 그런데도 나는 이 도시에서 계속해서 이 영화를 되새김질했다.
그 색안경을 쓰고 걸으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2015년 7월 21일의 부다페스트가 정확히 그랬다. 낮에는 리버티 브리지를 지나며 강바람과 햇빛을 오래 쐤고, 해 질 무렵에는 국회의사당과 노을을 봤다. 평범한 골목, 낡은 대문, 색이 바랜 벽면조차 영화의 프레임처럼 보였다. 정면으로 서서 좌우를 맞춰 보면 눈앞의 흔한 건물이 한 장의 스틸컷이 됐다. 그냥 지나쳤을 담벼락 앞에서 걸음을 멈췄고, 그날 기록에는 이미 반해버린 도시에 가까운 감정이 하루 전체를 끌고 갔다. 색안경은 분명히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편집해 준다.

그런데 이날은 호스텔에서 벌레가 나와 무료 조식도 받았었다. 이런 해프닝도 부다페스트를 여행하는 묘미라고 느껴진다. 영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을 직접 연출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두근거렸다. 실제 도시는 스크린만큼 정돈돼 있지 않다. 전선이 하늘을 가르고, 공사장 가림막이 서 있고, 관광객의 뒤통수가 프레임을 채운다. 영화의 그 균형은 수없이 자르고 비우고 가운데를 맞춘 결과였다. 현실에는 편집이 없다. 기대한 파스텔 대신 흐린 하늘을 만나면 도시가 나를 속인 것 같은 얕은 실망이 드는데, 속인 것은 도시가 아니라 내가 끼고 온 색안경이다.
영화도 사진도 결국 표현의 영역이다
그래서 영화가 입힌 색은 여행을 풍요롭게도 하고 방해도 한다. 아름답게 편집된 눈으로 흔한 골목에서 감동을 얻는 대신, 화면과 다른 현실 앞에서 공연히 서운해진다. 둘 다 같은 색안경에서 나온다.
사진 찍는 친구가 하나 있다. 그는 더 멋진 사진을 위해서라면 원본과 달라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보정을 세게 건다. 예전에는 그게 눈속임처럼 느껴졌는데, 이 영화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뀐다. 앤더슨도 존재한 적 없는 호텔을 지어 놓고 세상에서 제일 그럴듯한 색을 입혔다. 사진도 영화도 기록이 아니라 표현의 영역이고, 표현이라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쪽이 맞다.
나는 그 색안경을 벗지는 않기로 했다. 벗어 버리면 흔한 골목에서 스틸컷을 발견하는 즐거움까지 사라진다. 대신 그것이 색안경이라는 사실은 잊지 않으려 한다. 지금 눈앞의 도시는 주브로브카가 아니고, 이 거리는 누구의 편집도 거치지 않았으며, 벌레가 나오는 호스텔도 이 도시의 진짜 얼굴이라는 것. 그렇게 알고 쓰면 색안경은 나를 속이는 물건이 아니라, 도시를 한 겹 더 다정하게 보게 해 주는 렌즈가 된다.
10년이 넘은 지금 그 일기장을 다시 보다가, 내가 사랑했던 부다페스트의 영화 속 모습과 진짜 모습을 생각하며 적었다. 그 일기장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색감이 아른거리는 진짜 부다페스트의 모습이라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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