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남부 해안 ② — 다리가 막히자, 우리는 반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여행은 대개 지도 위에서 먼저 시작된다. 우리는 손가락으로 해안선을 따라 동그란 원을 하나 그려 놓고, 그 선만 따라가면 며칠 뒤의 내가 분명히 행복할 거라고 믿는다. 링로드는 그런 믿음을 갖기에 완벽한 길처럼 보인다. 섬을 한 바퀴 도는 단 하나의 도로. 시작한 곳으로 결국 돌아오는 깔끔한 원.
그러나 여행은 지도 위의 선이 아니라, 그날 도로가 허락한 만큼이라는 걸, 우리는 길 위에서야 배웠다. 남부 해안 ①은 그 깨달음이 막 시작되던 밤, 다리가 막혔다는 소식에서 끝났다. 이 글은 그 밤을 조금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그 다음 날 우리가 일부러 반대 방향으로 차를 돌린 이야기다. 계획이 무너진 자리에서, 셋이 다시 움직이는 법을 배운 하루이기도 하다.
①의 하루를 다시 넘겨보며
여행에서 돌아온 뒤 우리가 하는 일 중 하나는, 사진을 처음부터 다시 넘겨 보는 것이다. 그러면 묘하게도, 그 자리에 서 있을 때보다 사진 속에서 그날이 더 또렷해진다. 본 것을 한 번 더 보는 일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그제야 천천히 이해해 보는 일에 가깝다. 남부 ①의 하루가 그랬다.
남부로 내려가는 길은 넓은 들판이었다. 하얗고 동그란 덩어리들이 마시멜로처럼 굴러다녔는데, 우리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차를 세웠다. 여행 초반에는 별것 아닌 풍경 앞에서도 쉽게 멈춰 선다. 아직 무엇이 대단하고 무엇이 사소한지 판단할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해안으로 들어서자 절벽마다 폭포가 걸려 있었다. 크고 작은 물줄기가 곳곳에서 떨어졌고, 폭포마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셀야란드포스는 폭포 뒤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드문 곳이었다.



물줄기 뒤에 서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면, 떨어지는 물 너머로 풍경이 잘게 일렁였다. 우리는 늘 폭포를 정면에서 바라보는 데 익숙하지만, 가끔은 그 뒤에 서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익숙한 것을 반대편에서 보는 일은,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작은 선물 중 하나다.


다시 링로드를 달리다 거의 반원을 그리는 무지개를 만났다. 비와 햇빛이 수시로 교차하는 남부 해안에서는 무지개가 흔하다는데, 그날은 유독 또렷해서 달리던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무지개는 늘 우리가 멈출 때만 보인다.

그리고 검은 모래 평원을 한참 걸어, 오래전 불시착한 비행기 잔해를 보러 갔다. 사진을 다시 넘겨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그때 우리가 정말 보고 있던 건 비행기였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평원 위에 길게 늘어진 우리 자신의 그림자였을까. 여행지의 명소는 종종 그렇다. 우리는 그곳을 보러 갔다고 믿지만, 정작 오래 남는 건 그 앞에 서 있던 우리의 기분이다.



오루스투홀(Orustuhóll)도 그날 지나온 곳이다. 영어로는 Battle Hill, 전투 언덕이라 부른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조용한 언덕이었다. 다만 그 조용함 아래에는 1783년 라키 화산 폭발 때 이 일대를 덮은 거대한 용암류의 흔적이 깔려 있다. 강은 다시 물길을 냈고, 용암 위로 초록이 돌아왔다. 아이슬란드가 단순한 자연 관광지가 아니라 지질의 책 같은 땅이라는 걸, 이런 곳에 서 보면 어렴풋이 알게 된다.

오루스투홀 근처에는 차를 세우고 잠깐 보기 좋은 사진 스팟이 이어졌다. 지도에 크게 표시되지 않아도, 실제로 서 보면 충분히 예쁜 곳들이었다.


여기까지가 ①의 하루였다. 폭포와 무지개와 비행기 잔해. 사진으로만 보면 더없이 평화로운 여행이다. 문제는 늘 사진에 담기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다.
다리가 막히던 저녁
저녁이 되자 공기가 바뀌었다. 남부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계속 가면 된다고 믿고 있었는데, 가야 할 길 앞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다리가 막혀 더는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막힌 길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다. 그것은 계획을 세운 나에 대한 작은 모욕에 가깝다. 며칠 전 지도 위에 동그란 원을 그릴 때의 나는, 도로가 나를 기다려 줄 거라고 은근히 믿고 있었다. 길은 그런 믿음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길이 막히면, 사람도 빨리 지친다. 한 명은 이미 운전으로 녹초가 되어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셋이 함께 떠난 여행에서 처음으로 말수가 줄었다. 크게 다툰 건 아니었다. 다만 차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고, 우리는 그 무거움 속에서 각자 조금씩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여행은 종종 이렇게, 평소라면 굳이 마주하지 않았을 서로의 피로를 꺼내 놓게 만든다.
그 순간 중요한 건 누가 옳으냐가 아니었다. 오늘 어디서 잘 것인지, 내일 어디로 갈 것인지, 지금 누가 한 시간 더 운전할 수 있는지. 낭만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이런 실무적인 질문만 남는다. 나는 급히 갈 수 있는 숙소를 찾아 예약했고, 우리는 계획을 잠시 접고 그쪽으로 향했다.
하루를 끊어 준 숙소
그날 밤 우리가 숨을 돌린 곳은 화려한 호텔이 아니라 여행자 숙소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때 필요했던 건 멋진 방이 아니라, 차에서 내려 몸을 눕히고 다시 입을 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숙소라는 곳은 묘하다. 일정이 꼬인 날일수록, 그것은 잠을 자는 장소라기보다 하루를 끊어 주는 장치가 된다. 문을 닫고 짐을 내려놓는 순간, "일단 오늘은 끝났다"는 감각이 찾아온다. 도로 위에서 우리를 짓누르던 모든 결정들이 문밖에 잠시 멈춰 선다. 다음 날 조식까지 챙겨 먹고 나니, 전날 차 안을 채우던 무거움도 조금 옅어져 있었다.
우리는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단, 이제는 지도 위의 원을 따라가는 여행이 아니었다. 원은 이미 한쪽이 끊어져 있었다. 우리는 반대로 달려야 했다.
반대로 달리기 시작하다
지도 위에 원을 그릴 때는 방향이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시계 방향이든 반대든, 결국 같은 곳으로 돌아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로가 한 군데 끊기는 순간, 그 원은 더 이상 원이 아니다. 그것은 막다른 길과 우회로로 이루어진, 훨씬 정직한 지형이 된다.
그날부터 여행의 성격이 바뀌었다. 명소를 순서대로 찍어 나가는 여행이 아니라, 지금 갈 수 있는 길을 찾아 움직이는 여행이 됐다. 이상한 일이지만, 분위기는 전날 밤보다 나았다. 더 이상 무엇을 놓쳤는지 따지지 않게 되자, 적어도 "어떻게든 가 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모였다. 기대를 내려놓는 일이, 가끔은 사람을 가볍게 만든다.

비포장도로, 두 번째 객기
사실 우리는 ①에서 이미 한 번 객기를 부린 적이 있었다. 호기심에 오프로드로 들어갔다가, 우리 소형차로는 무리라는 걸 깨닫고 차를 돌렸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호기심이 아니라 절박함이었다. 막힌 길을 피해 돌아갈 우회로가 정말로 필요했고, 지도 위에는 길처럼 보이는 선이 분명히 있었다.
처음에는 괜찮아 보였다. 길은 거칠었지만 풍경은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바닥이 점점 험해지고, 차가 흔들리고, "이 차로 여기를 계속 가도 되나" 싶은 순간이 슬그머니 찾아왔다. 아이슬란드에서 지도 위의 선은 약속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는 갈 수 있었다는 기록일 뿐, 오늘의 내 차가 갈 수 있다는 보장은 아니다.



아이슬란드의 비포장도로, 특히 고지대로 향하는 길은 아무 차나 들어가선 안 된다. 렌터카 약관이 진입을 금지하는 구간도 있고, F-road는 사륜구동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풍경이 아무리 손짓해도, 여행에서는 보험과 안전이 먼저다. 우리는 그걸 안전한 안내문이 아니라 흔들리는 차 안에서 배웠다.
토리스 호수 근처에서 멈춘 순간
그렇다고 그 길이 통째로 실패였던 건 아니다. 중간에 차를 세우고 내려 예쁜 강을 봤다. 토리스 호수(Thoris Lake) 근처였다. 도로는 험했는데 물은 맑았고, 주변은 믿기 어려울 만큼 조용했다.


아름다움과 위험이 한 장면에 겹쳐 있을 때, 사람은 이상하게도 판단이 흐려진다. 풍경이 이렇게 좋은데 설마 큰일이야 나겠어, 하는 마음이 슬며시 든다. 자연의 광활함은 우리를 압도하는 동시에, 우리를 방심하게 만든다. 그 순간 우리는 둘로 나뉘어 있었다. 누군가는 길을 걱정했고, 누군가는 풍경에 들떴다. 그리고 그 둘 다 틀리지 않았다.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
도로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사진으로 보면 그냥 거친 길이지만, 차 안에서 느끼는 긴장은 사진에 찍히지 않는다. 계속 가야 하는지, 돌아갈 수 있을 때 돌아가야 하는지를 정해야 했다.

그때 맞은편에서 오던 캠핑카 운전자가 우리에게 돌아가라고 일러 주었다. ①에서도 비슷한 조언을 들었었다. 그러니까 이번이 같은 종류의 두 번째 조언인 셈이었다. 한 번은 흘려들을 수 있어도, 두 번째에는 귀를 기울이게 된다. 길을 더 잘 아는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는 일은, 사실 자존심을 한 겹 내려놓는 일이다.

우리는 더 무리하지 않고 돌아 나왔다. 결과적으로 잘한 결정이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갈 수 있을 것 같은 길"과 "가도 되는 길"이 다르다. 일반 렌터카로 비포장 고지대를 밀어붙이는 건 용기가 아니라, 종종 사고의 다른 이름이다. 돌아서는 일이 전진보다 어려울 때가 있다는 걸, 그 길 위에서 배웠다.
다시, 원래의 길로
돌아 나오는 길은 고생스러웠다. 그러나 그사이 다리가 복구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끊겼던 원의 한쪽이 다시 이어진 것이다. 우리는 원래 가려던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무너졌던 계획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다시 나아갈 방향이 생겼다.

이때부터 우리는 조금 더 현실적인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무리한 우회보다 확실한 도로를 택했고, 멋진 경치보다 무사한 도착을 앞에 두었다. 여행이란 결국 많은 장면을 욕심껏 담는 일이 아니라, 안전하게 다음 밤까지 도착하는 일이라는 걸, 그제야 몸으로 인정하게 됐다.
Hjálparfoss, 계획에 없던 작은 폭포
돌아가는 길에 Hjálparfoss에 들렀다. 바쁘면 지나쳐도 그만인 곳이지만, 들르면 후회는 거의 없는 폭포다. 크고 압도적인 폭포가 아니라, 작고 다정한 쌍둥이 폭포에 가깝다. 두 갈래의 물줄기가 현무암 지형 사이로 떨어져 하나의 맑은 웅덩이로 모인다.


셀야란드포스나 스코가포스처럼 보는 이를 압도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날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건 이 작은 폭포였다. 친구 둘은 폭포 근처에서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치며 놀았다. 전날 밤의 무거움과 비포장도로의 긴장이 그 물소리에 조금씩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여행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가장 유명한 곳에서 오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여행이 우리에게 거는 작은 농담이다. 우리는 큰 것을 보러 멀리까지 갔다가, 계획표의 틈에 끼어든 작은 것에서 위로를 받고 돌아온다.
크라베 게르디에 도착하다
긴 우회와 회항, 그리고 계획에 없던 폭포까지 지나, 우리는 크라베 게르디에 도착했다. 하루 전만 해도 길이 막혀 여행이 끝난 줄 알았는데, 결국 다시 흐름 위로 돌아와 있었다.

이 구간에서 가장 크게 남은 깨달음은 단순하다. 아이슬란드 렌터카 여행은 계획표대로 움직이는 여행이 아니라는 것. 길이 막히면 돌아가야 하고, 현지 운전자가 말리면 들어야 하고, 컨디션이 무너지면 숙소에서 회복해야 한다. 대신 그 사이사이로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이 끼어든다. 검은 모래 위의 잡초, 용암이 덮은 언덕, 우리를 돌려세운 캠핑카 운전자, 그리고 작고 맑은 쌍둥이 폭포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이 하루는 실패한 날이 아니라, 여행이 비로소 여행다워진 날이었다. 계획은 무너졌지만, 그 자리에서 우리는 셋이 다시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어쩌면 우리가 원래 보러 온 것은 폭포와 빙하가 아니라, 계획이 무너졌을 때의 서로의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구간을 위한 현실적인 메모
- 아이슬란드에서는 도로 통제와 날씨가 일정을 지배한다. 출발 전 road.is, vedur.is, safetravel.is를 확인하는 것이 첫 일과여야 한다.
- 지도에 길이 있다고 모든 렌터카가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F-road와 비포장 고지대 길은 차종·보험 조건을 먼저 확인한다.
- 무리한 우회보다 컨디션 회복이 먼저다. 지친 운전자는 여행 전체의 리스크다.
- 작은 폭포나 이름 없는 사진 스팟도 충분히 기억에 남는다. 다만 시간은 계속 밀리니 우선순위를 정해 두는 편이 낫다.
출처와 확인 링크
- Sólheimasandur plane wreck
- Orustuhóll, Katla UNESCO Global Geopark
- Hjálparfoss, Visit South Iceland
- Iceland road conditions
- Icelandic Met Office
- SafeTravel Iceland
🇮🇸 아이슬란드 8일 자유여행 시리즈
- 여행 프롤로그 — 편도 항공권으로 이어 붙인 긴 환승길
- 렌터카 여행 시작 — 싱벨리어에서 이미 반해버렸다
- 골든서클 — 싱벨리어·게이시르·굴포스 하루 코스
- 남부 해안 ① — 셀야란드포스·비행기 잔해·다리 붕괴
- 남부 해안 ② — 다리가 막히자, 우리는 반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보는 글)
다음 글은 동부와 빙하 구간으로 이어진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