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일부러 졌다? 남아공전 후 퍼진 홍명보 4차원 체스설

남아공전이 끝나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단순했다.
이걸 졌다고?
한국은 이기면 깔끔했다. 적어도 비기기만 해도 훨씬 편한 길이 열렸다. 그런데 0-1로 졌다. 경기 내용도 시원하지 않았다. 손흥민은 선발이 아니었고, 실점 뒤에도 “이제부터 진짜 몰아친다”는 느낌이 잘 오지 않았다. 답답한 패스, 애매한 위치, 늦게 뜨거워지는 경기. 그냥 놓고 보면 졸전이라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런데 인터넷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처음엔 화를 냈다. 그 다음엔 경우의 수를 계산했다. 그러다 누군가 대진표를 다시 봤다. 그리고 아주 이상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잠깐만, 이거 3위로 가는 게 더 좋은 거 아냐?”
여기서부터 홍명보 4차원 체스설이 시작된다.
물론 진짜로 일부러 졌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건 증명할 수도 없고, 함부로 단정할 수도 없다. 이 글은 커뮤니티가 만든 가정 놀이에 가깝다. 너무 어이없는 경기를 봤을 때, 사람들은 그 어이없음에 설명을 붙이고 싶어 한다. 그냥 못했다고 하면 허무하니까, 차라리 거대한 설계였다고 상상하는 쪽이 더 재미있다.
문제는 이 상상이 묘하게 대진표와 맞아떨어진다는 점이다.
한국이 조 2위로 올라갔다면 캐나다를 만나는 길이었다. 캐나다도 이제 예전의 캐나다가 아니다. 그 다음 길목에는 네덜란드나 모로코 이야기가 나온다. 이름만 봐도 피곤하다. 모로코는 지난 월드컵 4강팀이고, 네덜란드는 토너먼트에서 굳이 빨리 만나고 싶은 팀이 아니다.
반대로 3위로 살아남으면 계산이 달라진다. 경우의 수는 복잡하지만, 커뮤니티에서는 이집트나 이란 쪽을 만나고, 그 다음에 미국이나 에콰도르 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 돌았다. 이 팀들이 쉽다는 뜻은 아니다. 월드컵 토너먼트에 쉬운 상대는 없다. 그래도 팬들 머릿속에서는 바로 비교가 시작된다.
캐나다, 모로코, 네덜란드보다 이집트, 이란, 미국, 에콰도르가 낫지 않나?
이 문장 하나가 사람들을 흔들었다.
남아공전 경기 내용까지 이 농담에 기름을 부었다. 실점 뒤에도 한국은 이상하게 뜨거워지지 못했다. 벤치는 조용했고, 공격은 답답했고, 경기는 끝까지 미지근했다. 보통은 이걸 전술 실패라고 부른다. 실제로 그렇게 보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
인터넷은 여기서 한 번 더 비틀었다.
“전술이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못 알아본 전술 아니냐.”
이 말이 웃긴 이유는 다들 진심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천재적 전략이라고 박수치는 분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못했으니까, 차라리 일부러 그런 거라고 말해야 웃을 수 있는 상황이다. 졸전을 빅픽처로 바꾸고, 무기력을 연막으로 바꾸고, 답답한 교체를 토너먼트 설계로 바꾸는 인터넷식 생존법이다.
한국 축구 팬들은 이런 방에 너무 익숙하다.
이기면 끝나는 경기를 놓치고, 다른 조 결과를 보게 된다. 처음 보는 나라의 승점과 득실차를 따지고, 전혀 관심 없던 경기의 후반 추가시간까지 보게 된다. “경우의 수”라는 말은 한국 축구에서 거의 계절 행사처럼 돌아온다.
이번에도 결국 그 방으로 돌아왔다.
경우의 수의 방.
그 안에서 누군가는 감독을 욕하고, 누군가는 탈락을 걱정하고, 누군가는 대진표를 붙잡고 정신승리를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근데 살아만 가면 오히려 길은 괜찮은 거 아냐?”
이게 4차원 체스설의 본질이다. 승리를 포기한 천재적 전략이라기보다, 패배를 견디기 위해 만든 팬들의 농담이다. 말도 안 되는 경기였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해석이 붙었다. 너무 허무한 패배라서, 사람들은 그 허무함을 웃긴 이야기로 바꾸고 싶어 했다.
냉정하게 보면 한국은 그냥 못했다. 남아공전은 일부러 져서 만든 그림이라기보다, 준비가 부족한 팀이 월드컵에서 보여준 불안한 경기로 보는 쪽이 맞다. 그렇게 보는 게 가장 현실적이다.
그런데도 이 농담은 계속 돈다.
대진표가 너무 묘하기 때문이다. 졌는데 완전히 끝난 것 같지는 않다. 욕은 나오는데 계산기를 내려놓을 수도 없다. 경기력은 답답했는데, 살아만 남으면 다음 그림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이 밈이 살아난다.
한국 축구는 빌드업은 답답해도 경우의 수는 잘 만든다. 그리고 만약 이 길로 진짜 한두 경기 더 살아남는다면, 남아공전은 역사상 가장 이상한 재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때 누군가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날 홍명보의 4차원 체스를 보고 있었던 거다.”
댓글
댓글 쓰기